* 거듭나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라
프랑스의 인류학자 방주네프에 따르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분리, 전이, 통합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분리’는 이전 상태로부터 결별을 뜻하는데, 다시 말해서 옛 존재의 죽음인 것이다. 이것을 중생(重生)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이전의 존재가 죽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겠는가. 이전의 세계와 분리되는 아픔이 어떤 것인가 보자.
구약 시대에 <한나>라는 여자가 기도와 서원으로 얻은 아들 사무엘을 젖을 떼자마자 성전으로 데려가 대제사장에게 맡겨 성막에서 자라게 한다. 모세에 필적할 만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로 선지자가 되었다. 이처럼 모성애(母性愛)의 본질은 이별과 상실을 최종 목표로 하는 서글픈 사랑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파스칼은 모성애에 관해서 특징적인 두 가지 요소로 분석하고 있다. 그 하나는 ‘합일의 정열’이다. 자식과 함께 있고 싶다. 함께 살고 싶다. 자식과 운명을 함께 하고 싶다고 바라는 모성의 본능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일의 정열만으로는 자식을 결코 훌륭하게 키울 수 없다고 한다. 자칫 자식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는 이유로 올바른 인간성 형성에 최대의 장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母性에서 ‘분리의 열정’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결국 어머니의 사랑이란 자식을 과감하고 냉정하게 떼어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여성에게 부과되는 가장 엄격한 행위로 어머니로서 최종 능력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떼어내는 열정이 훗날 효도하는 자식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왜 기억하지 못하는지 아쉽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를 멀리 놓아주는 능력은 위대한 모성애가 아닐 수 없다. 이기심이나 독점욕, 지배욕을 버리고 사랑하는 자의 행복만을 바랄 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음으로써 진실로 모성애는 위대해지는 것이다. 자식이 홀로 독립하여 떠나는 것은 부모에 대한 보은(報恩)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식과 함께 하고 싶다는 합일의 정열만을 내세우고 그것만을 집착하는 모성애는 오직 본능(本能)적인 모성애일 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죽은 나무에 꽃도 피우게 하는 것이 모성애라 하지만, 자식 스스로 제어하고 끝없이 아프게 이룩해내지 못하면 오히려 불결해지기까지 하는 것이 또한 모성애인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항상 문 열어놓고 기다리시고 계실 따뜻한 어머님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식은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전이’란 혹독한 고난을 통해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는 과정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오래된 자아를 소멸 시키는 ‘전이’는 기나긴 투쟁의 시간이다. 과거에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점점 소멸되어 새로운 자신으로 채워지는 과정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를 성화(聖化) 라 하는데 성스럽게 되어가는 과정이라 한다. 스님들도 승복을 입었다고 바로 승려가 되지 않는다. 일정한 교육기간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계를 받고 스님이 된다. 제대로 된 중이 되려면 큰 스님 밑에서 혹독한 수양과 교육을 받고나야 비로소 스님다운 스님이 되는 것이다. 승복만 입었다고 다 중이 아니다. 무지한 신도들 재물이나 낚아채는 땡 중들이 허다하다. 군인들도 혹독한 훈련병 과정을 거쳐야 이등병 계급장을 단다. 우리가 해병대를 알아주는 것은 그들이 지독한 훈련을 견뎌낸 결과다.
‘통합’이란 무엇인가? 분리는 단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전이는 오랜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통합은 조용히 다가온다. 지금까지 몸에 밴 습관이나 행동을 떨쳐내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새로운 모습으로 새로운 지위를 허락받게 되는 것을 말한다. 석가모니 붓다의 삶을 살펴보자. 그는 왕자로 태어나 안락한 생활을 하다가 29세에 인간 세상의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고통을 알게 된 후 출가하는데 이것을 ‘분리’라 한다. 이전의 다른 존재, 더 성숙한 존재가 되기 위한 ‘분리’였다. 그렇지만 출가했다고 해서 바로 붓다가 된 것이 아니다. 6년 동안 엄청난 긴 고행을 거친다. 바로 ‘전이’를 겪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35세에 드디어 깨달음을 얻고 붓다라는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통합’이 일어난 것이다. 새로운 존재로 지위가 확고해진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삶에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이전의 존재와 ‘결별(분리)’하는 상징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전이’의 단계에서 나름대로 혹독한 시련을 감당하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막 태어난 영아는 산모와 연결된 탯줄을 잘라내지(분리) 않으면 두 생명체가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금 나만의 시련과 고난이 힘들어 더는 못 견디겠다고 하는 분이 있다면 그것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한 과정으로 받아드리고 극복하기를 바란다. 본인뿐만 아니라 부모들은 우리의 자녀가 시련과 고통에 직면해 있다고 해도 너무 걱정해서는 안 된다. 이 ‘전이’의 단계를 거쳐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지 않으면 부모인 나도 자식도 모두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빌립1:29)‘고난은 축복의 전주곡이라고 쓰여 있다.’ 고난 없이 얻어진 축복은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독한 진통은 자기 발전을 위한 통과 절차다. 자기 자신을 위해 스스로 만든 ‘분리’된 시간과 공간을 고독이라 하는데 이때의 고독은 다를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 불안해하는 외로움의 상태가 아니라 의도적인 분리의 상태이자 나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고독하게 외로워져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온전하게 홀로 될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 겸손해진다. 인간적인 인생에 대한 부끄러움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 자신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이 같은 ‘고독의 문지방’을 넘어설 각오를 하자. 톨스토이는 ‘사람들은 세상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무도 자신이 변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하라’고 하면 내가 뭘? 변해야 하느냐고 듣기 싫어한다. ‘너나 잘 하세요’다. 쓴 소리는 죽기보다 싫어한다. 아니 됐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 명심보감에 이런 글이 나온다. ‘오도선자 시오적, 이요 도오악자 시오사(道吾善者 是吾賊, 道吾惡者 是吾師).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치켜세워 부추기는 사람은 나의 적이요, 나를 잘 못하고 있다고 지적해주고 깨우쳐주는 사람은 나의 스승이라는 말이다. 내 잘 못을 따끔하게 지적해 줄 이가 있다면 그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나날이 새롭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고 싶다면 이전의 존재와 결별해야 한다. 혹독한 오늘의 시련과 고통이 더 없이 필요한 즉, 지금의 이 순간의 고통이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할 것임을 굳게 믿어야 한다. 그러니 나날이 결별하고, 나날이 새롭게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