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사랑
건강하게, 그리고 품위 있게, 늙어가는 게 모든 사람의 바램이다.
늙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여자는 갱년기가 지나면서 대체로 성에대해서 무관심해지기 시작하지만,
남자는 죽는 순간까지 성에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언제라도 뿌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산다고 한다.
그러다가 하초에 힘이 빠지고 소변줄기가 멈출 때가 오면, 남자의 허무는 극도에 달한다.
“남자가 흘리면 안 되는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라는 공중화장실 남자소변기 앞에 적힌
경구보다 더 노골적인 경구도 있다.
‘65세 이상인 분은 좌변기를 이용해주세요.’
중국화장실에는 ‘한 거름만 다가서면 문명도 한 단계 나아간다.
(一步前進, 文明一進)”는 경구도 있다.
이처럼 ‘발기불능’은 남자에게는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의 성기가 소변전용기로 전락하면서 엄청난 심리적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다.
더 이상 반응 없는 성적욕망이 희미한 눈 동작에만 남아있는 처연한 모습이 노인이다.
한 노인이 젊은 여자의 몸을 바라본다.
그 여자의 움직임을 좇아 노인의 고개는 왼편으로 갔다가 오른편으로 돌아간다.
그 여자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본다.
걸을 힘조차 없어 보이는 노인에게도 여자의 몸을 보는 일이 그토록 쓸쓸하면서도 비루한
인간의 본질을 나타내는 표상처럼 여겨질 때가 온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관람한 적이 있었다.
거동조차 부자유스런 노인이 병수발을 온 중년의 도우미 여자의 몸에 눈빛을 보낸다.
그 절실한 노인에게 건네는 중년아낙네의 육보시(肉普施)는 경건하기 까지 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중국문화권에는 젊은 여자의 체취가 노인에게 ‘불로초(不老草), 선약’이라는 오래된 전설이
전해진다. 서양도 다르지 않다.
구약성경 열왕기상 1장 1절에 다윗 왕이 늙어 이불을 덮어도 몸이 더워지지 아니함에 어린소녀
를 하나 구해서 품에 안고 자도록 보살폈다는 기록이 있다.
성경은 이 소녀는 왕을 수종 봉양하였으나 동침은 하지 아니하였다. 라는 사족을 달아두고 있긴 하지만.....
‘비아그라’의 발명으로 한약의 수요가 급감하는 엄청난 변화가 생겼다.
철철이 지어먹던 보약은 특정한 증상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정력제로서 큰 효용이 있는 것으로
허준의 동의보감에 기록되어있다.
심청전에 나오는 인당수 험한 바다에 뱃길을 연 남경상인은 실제 늙은 아버지의 잠자리를
시중해줄 동녀(童女)를 구하기 위해 쌀 삼 백석을 지불하는 효성 지극한 아들이었다. 고한다.
고려와 조선조 내내 서해안 에 출몰하여 어린 여자를 잡아간 왜구나 오랑캐들에 관한 흉흉한
민담도 전해오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누어있는 S그룹총수의 소문이 얼마 전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한꺼번에 여러 여성을 불러 성을 산 정황이 담긴 동영상이 공개된 적이 있었고
국회의장까지 지낸 70대 후반의 정치인이 골프장 캐디를 상대로 찐한 성적 접촉을 시도하다
법정에 서는 망신을 당한 적도 있었다.
사회적 지위나 이미지에 걸맞지 않은 노년의 일탈이 추한 모습으로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는 게
한 둘이 아니지 않은가?
문지방을 건널 다리 힘과 종잇장을 들어 올릴 힘만 있으면 섹스가 가능하다는 오래된 속설이 있다.
인생의 황혼기에 들면서 더욱 성에 집착하는 것이 사내들의 생리이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증거를 성적 능력에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소변 조절기능이 떨어져 기저귀를 차고 다니면서도 죽기 전까지 젊은 여성과 섹스를 했다는 재벌
총수의 신화도 있다.
새벽이 되어도 일어설 줄 모르는 ‘발기불능’은 단순히 신체적 불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체면과 남성성을 조롱하고 인격까지 모독하는 비극적 단어다.
인류사에 수많은 비극이 있지만, 커플이 간절하게 섹스를 시도하는데 발기가 안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는 그런 비극보다 더 지독한 비극은 찾기 힘들다. 그 순간 자살충동을 받는다. 는 사례도 있다.
그래서 ‘새벽에 음경이 서지 않는 사내에게는 돈도 빌려주지 말라’는 일본상인들의 속담도 있다.
인새에 3대 재앙 중 ‘소년등과’나 ‘중년상처’보다 더 치명적인 게 ‘노년궁핍’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년의 최대 권력은 돈이다. 연륜이 쌓인 지혜도 재물이 동반해야 권위가
서는 법인데, ‘젊은 시절 골프치고, 술값 펑펑 던지고, 아들 집사주고, 마누라 밍크코트 사주고 살다가
70대 후반에 택배, 경비, 폐지 줍는 노인들이 부지기수인데, 이걸 ’실버파산‘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들은 부모를 간병할 수 없다.
고령의 부모를 간병하는 준 고령이 된 아들이 간병이 되겠는가?
오히려 학대할 위험이 높다는 연구결과다. 성장기에 훈련된 효도의식도 준 고령이 된 아들에게는
무의미해 진다. 그래서 ‘긴 병에 효자 없다.’는 우리 속담도 있다.
소설가 박범신은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고 소설 <은교>에서 말했다.
애절한 늙음의 허무와 비애가 찐하게 전해오는 말 아닌가?
시인 고은은 <순간의 꽃>이라는 시에서 누리던 권력을 잃은 노인의 비참함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세월이 차면 생명도 가기 마련이다.
생명이 다하면 돈도 명예도 무슨 소용인가.
시신에 입히는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하지 않던가.
늙은이들이 노욕 때문에 추하게 늙어가서는 안 된다.
돈 따라 권력 따라 노구를 이끌고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다니는 모습은 실로 민망스럽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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