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지(坎止)
'감지(坎止)'란 <구덩이 감, 그칠지>
주역에 나오는 말로 '물이 구덩이를 만나 멈춘다’는 의미다.기운 좋게 흘러가던 물도
구덩이를 만나면 꼼짝없이 그 자리에 멈춘다.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다. 물이
가득 채워져 넘쳐흐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상황이다. 누구나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구덩이에 빠질 때가 온다.
사람의 그릇은 이처럼 구덩이에 빠진 고난과 시련과 역경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는 법이다. 어떤 이는 구덩이에 갇혀있는 자신을 할퀴고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를
하는가 하면,어떤 이는 물이 구덩이를 채워 넘쳐흐를 때까지 마음을 다잡아 재기
를 노려 구덩이에 빠지기 전보다 잘 나가는 사람이 있다.
‘세한도’를 그린 조선시대 붓글씨의 대가 추사 김정희는 3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병조판서까지 지내다가 모함에 빠져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된다.
그는 구덩이에 빠진 걸 한탄하지 않고 그가 거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그림을 그리고 붓글씨를 쓰는 일이다. 먹을 가는 벼루만 해도 10개가 밑창이 빠지
고 붓은 천 자루가 닳아서 뭉개졌다. 고 한다.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 다산 정약용은 18년이라는 길고 긴 귀양살이를 전남 강진
에서 보낸다. 깊은 구덩이에 빠진 역경과 시련과 절망과 분노와 좌절을 극복하면
서 기약 없는 훗날이지만, 스스로를 닦아 책을 쓰기 시작한다. ‘목민심서’ ‘경세유
표’ 등 대작과 수많은 저서를 남겨 후대에 삶의 지표를 남겼다. 다산에게는 구덩
이는 구덩이가 아니었다.
‘논어’에 “군자는 곤궁 속에서 굳세지만, 소인은 궁하면 흐트러진다.”고 했고 ‘맹
자’는 고 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내리려
할 때는 먼저 그의 심지를 괴롭게 하고, 뼈와 힘줄을 힘들게 하며, 육체를 굶주리
게 하고, 그가 행하고자 하는 바와 어긋나게 한다. 그 이유는 마음을 격동시켜
성질을 참게 함으로써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했다.”
세상에 넘을 수 없는 벽 같은 건 없다. 고통 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성공이란 두 글자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수 없이 많은 고통의 과
정과 과정이 거미줄처럼 엉켜있다. 버스를 타고 서울을 가다 보면 서울진입로
방음벽을 타고 올라온 담쟁이를 보게 된다.
<담쟁이> 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 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 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