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를 깎는 목수
왕이 된 환공이 자기 방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고,목수는 뜰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불현듯 목수가 망치와 끌을 내려놓고 왕에게 다가가 물었다.
"폐하께서 지금 읽고 계시는 것은 무엇인지요?"
"성현의 말씀이라네."
"그러면 그 성현들은 살아 있습니까, 죽었습니까?"
"그야 오래전에 다들 죽었지."
"그렇다면 폐하께서 지금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이 남긴 찌꺼기로군요."
왕이 그 소리를 듣고 가만있을 리 없었다.
"수레바퀴 깎는 목수 주제에 무얼 안다고? 네 이놈!
당장 네놈이 한 말에 대해 이치에 닿는 설명해 보거라.
만약 그렇지 못할 시에는 목숨이 없어질 줄 알라!"
왕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수레공은 전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저는 어디까지나 제가 하는 일에서 얻은 경험으로 미루어 말씀드린것 뿐입니다."
"그래도 이놈이!"
수레공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수레바퀴를 깎을 때 너무 깎으면 헐렁해서 바퀴가 쉽게 빠져버립니다.
또 덜 깎으면 너무 조여서 들어가지 않습지요.
그러므로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게 적절히 손을 놀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퀴가 꼭 맞아 원하는 바대로 일이 됩지요.
하지만 이 기술은 손으로 익혀 마음으로 짐작할 뿐 말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요령을 심지어 제 자식 놈에게 조차 가르쳐 주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이 일흔이 넘도록 제 손으로 직접 수레
바퀴를 깎고 있는 것입니다.
수레바퀴 만드는 일에 나이가 70이나 됐으면 웬만한 작업 공정을 매뉴
얼로 만들어 놓고 실행하면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정확하게 계량화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고자 했다.
수레바퀴는 오늘날 자동차 바퀴처럼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는 정밀 작업인지라 계량화가 불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자동차는 대량 생산되지만 수제 자동차는 훨씬 비싼 고가로 팔리
고 있다. 음식과 술의 경우 조리법대로 만들더라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손맛의 차이가 난다. 그래서 단골집 주방장이 바뀌면 우리는 발길을 끊는다.
지침서에 “이렇게 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제안이나 권고에 불과하다.
책이란 ‘과거에 이렇게 했다’는 보고는 될 수 있지만 지금이나 미래에
‘이렇게 하고 이렇게 해야 한다’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사람에게 닥치는 상황과 사건은 동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몇 번의 경험으로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다”라는
식으로 견적을 뽑고 결론을 내린다. 새로운 상황을 만나더라도 별다른 생
각을 하지 않고 앞서 내린 견적과 결론에 따라서 판단을 한다.
이렇게 한 번 마음이 굳어지면 여간해서 바꾸기 어렵다.
굳어진 마음에 어긋나면 잘못된 것이고, 일치해야만 올바르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경험이나 체험을 진리인 것처럼 보편화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내가 모르는 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내가 못 본 것을 먼저 본 이들의 경험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주변에 고수들이 많다.
내가 모르면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나보다 먼저 보는 이들은 항상 남다른 노력 끝에 보게 되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