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대취(大予大取)하자
손자병법을 읽다가 ‘대여대취’라는 글에 마음이 끌렸다.
‘크게 버려야(주어야) 크게 얻는다.’ 는 말이다.
이 세상을 적당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금 주고 많이 받으려는
사람들에게도 경종을 울리는 말이다.
이는 작게는 개인생활에도, 크게는 나라를 운영하는데도 적용된다는 말이다.
낚시꾼인 동료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낚시 할 곳을 물색한 다음 낚싯
밥을 많이도 뿌려놓고는 낚시할 생각은 않고 한 동안 쉬고만 있다.
그 이유란 큰 고기들이 안심하고 달려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어를
낚는다는 것이다.
성경 <누가6장>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넘치도록 안겨 주리다.
’라고 한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고 있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예수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져라.”고 한 예수님
의 말씀이 생각이 난다.
18세기 조선시대 실학자 박재가는 “사람이 벽(癖)이 없으면 쓸모없는
사람일 뿐이다”고 말했다. 누구나 벽이 있다는 말 아닌가. 그런데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왕왕 벽이 있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찮은 것이라도 이렇듯 벽이 있어야만, 경지에 도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부족한 사람은 있어도 부족한 재능은 없다’고 했다.
부족한 재능도 끊임없이 노력하면 어느 순간 길이 열리게 된다.
노력하다 안 된다고 중간에 포기하려는 생각만 버린다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해낼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나는 이러니까 안 되
겠지? 이런 나도 할 수 있을까?” 라며 그런 생각들로 사로잡혀 있다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부족한 게 있거나,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벽을 넘어선 고수들을 찾아
어떤 점이 나와 다른지,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지 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벽(癖)이란 글자는 질(疾)에서 나왔다고 한다. 병중에서도 중병 이라는
말이다. 조선의 세종대왕은 좋은 문장을 보면 백 번을 읽고, 백 번을 쓰
기(百讀百習)를 마다하지 않았고 바보 김득신은 “책 한 권을 만 번씩
읽었다”는 문장가이다.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18년의 긴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목민심서
등의 수 많은 역작을 남겼고, 추사 김정희는 9년 동안 제주 유배생활 속
에서도 조선 최고의 글씨, 최고의 그림을 그렸다.
그가 붓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먹을 가는 벼루만 해도 10개 가
밑창이 나고 붓은 천 자루가 달아서 뭉개졌다고 전해진다.
이들이야말로 벽을 넘어 한 시대를 이끈 대여대취의 고수들인 것이다.
세계적인 석학이나 거인들 치고 어느 한 분야에 바보처럼 천착하지 않은
사람 없다. 누구나 만족한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 때문에 나태해질 수
있고 더 이상 도약이나 성장을 이루어 내지 못한다.
도전이나 시련이 없는 곳에서는 환경이나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더 이상
문명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번은 정말
독해져야 한다.'세상이 뭐라 해도, 남들이 뭐라 해도 독할 때는 독해져야
한다. 추호도 흔들림 없이 나가야 한다. 그래야 뭔가 얻게 된다.
적당히 일하며 적당히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정확히 적당한 대우만
해준다.반면 무엇인가에 목숨을 걸고 미칠 정도로 몰입하는 사람에게는
그만큼의 대우와 보상을 해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다.
예수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마라’라고 말씀한 것도 먹고
입는 것에 인생의 긴 시간을 빼앗기지 말고 보다 큰 꿈을 꾸며 살라는
말이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했으니. 성철 스님이 ‘밥은 죽지 않을
정도만 먹고, 옷은 살이 보이지 않을 정도면 되지만, 공부만은 밤을 새워서
하라’고 하신 말씀도 다 같은 맥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