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한숨은 돌렸다.
지난 1년여가 무척 고생스러웠지만 얻은 것도 많다. 빠르고 과감하게 움직인 덕택에 기업 체질이 확 달라졌다.
또 다른 위기가 오더라도 이제는 해볼 만하다." (중견 A그룹 부회장)
"작년 이맘때 지상과제는 생존이었다.
문제 사업장 매각, 임금ㆍ보너스 삭감 등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취했다. 결과적으로 올 상반기 실적이 2008년 상반기를 앞질렀다.
단단히 긴장했던 것이 약(藥)이 됐다." (B건설사 대표)
"주택담보대출로 집 장만을 한 탓에 작년 이맘때 금리 걱정을 많이 했다.
보너스 삭감이다, 비상경영이다 해서 분위기가 어수선했지만 씀씀이를 줄이면서 그럭저럭 버텨왔던 것 같다." (직장인 Y씨ㆍ37)
세계 경제에서 글로벌 금융위기의 저주가 채 가시지 않았다지만 한국은 정반대다.
오히려 'V의 축복(급속한 경기회복)'을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에서라면 한국 경제는 2009년 크게 한 밑천을 잡았다.
지난해 4분기 실질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전기대비 -5.1%. 하지만 한국은 이미 연초부터 'V자형 경기회복'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 매분기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고, 3분기에는 7년 반 만에 분기성장률 3%대를 기록했다.
올 한 해 성장률 또한 플러스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
'2009년은 6ㆍ25전쟁 이후 네 번째 마이너스 성장의 해가 될 것'이라던 이코노미스트들의 연초 예측은 모두 빗나간 셈이다.
한국 경제는 사실상 불황을 겪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통상 두 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경기침체'로 정의한다면 한국 경제에는 침체가 나타나지 않았다.
경제의 외형뿐만이 아니다. 주식회사 한국의 현금흐름표는 더욱 좋다.
올해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400억달러를 넘어 사상 최대 기록을 세울 전망이다.
수출 호조로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커지고 외국인 투자자금이 급격하게 유입되자 한국은행 곳간에 달러도 넘치고 있다.
지난 11월 말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사상 처음으로 2700억달러를 넘어섰다.
주요 기업들의 실적도 눈부시다.
삼성전자, 현대ㆍ기아자동차, LG디스플레이 등은 지난 3분기 사상 최대 분기 실적을 기록했다.
같은 시기 한국거래소 제조기업 1381개사 기준 매출액 영업이익률은 8.0%로 위기 이전인 2008년 2분기(8.1%) 수준을 회복했다.
한국 경제 전반으로 위기 후 재도약을 위한 '빅 모멘텀'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2010년을 앞둔 현시점에서 한국 경제가 직면한 환경은 '불확실성' 투성이다.
대외적으로는 △선진국 수요 위축 장기화 △중국 과잉생산 능력 △선진국 출구전략 및 달러 캐리 트레이드 리스크 △유가 상승
△미국발 금융위기 재발 가능성 등에 대응해야 한다.
대내적으로는 △가계부채 △부동산 등 자산가격 거품 △고용 없는 성장 △저축ㆍ소비 및 수출ㆍ내수 재조정 등에 직면해 있다.
이 같은 장애물을 뛰어넘으며 성장 모멘텀을 살려나갈 국가경제전략이 마련돼야 하는 시점이다.
◆'V의 저주' 고성장 후유증 ◆
투자정체ㆍ자산버블 경계 목소리 높아 2009년 12월 '주식회사 한국'은 너무 좋아서 불안할 정도다.
10년 전 외환위기 이후를 떠올려 보면 이런 걱정이 '이유 없는 불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98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의 급격한 회복은 오히려 이후 여러 부작용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98년 한국 경제에 대해 '위기 후 최소 3~4년간은 성장이 정체할 것'이라는 시장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L자형 회복을 점친 이코노미스트들 예측과는 반대로 한국 경제는 사실상 급격한 V자형 회복을 경험했다.
98년 1분기 -7.8%를 기록했던 GDP 성장률은 그해 3분기에 0.5%로 올라서더니 99년부터는 분기 성장률이 3%대에 육박했다.
덕분에 2001년 성장이 급속히 둔화되기 전까지 우리 경제는 연간 GDP가 8~9%씩 늘어나는 고성장을 다시 한 번 기록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고성장의 후유증은 곧바로 투자 정체와 자산 버블로 나타났다.
이른바 'V의 저주'다.
97년 외환위기 전 연간 12%씩 증가했던 제조업 유형자산은 이후 2003년까지 매년 3%남짓 늘어나는 데 그쳤다.
그나마 자산재평가 효과를 제외하면 이 수치는 마이너스로 떨어진다.
기업에 현금이 넘쳐도 투자를 하지 않는 현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부동산 경기 과열은 양극화의 부작용을 극대화시키기도 했다. 신용불량자가 400만명이나 생겨났던 2002년 초
서울 집값은 전년보다 30% 이상 뛰어올랐다.
당시 경제 상황이 이 정도였다면 2009년 말을 사는 오늘의 한국인이
'데자뷰(기시감-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다는 느낌이나 환상)'를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당장 부동산 버블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80년대 이후 우리 경제를 돌이켜보면 장사를 잘했던 한 해 이후에는
반드시 부동산 가격 상승의 재앙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자금이 생산적 투자보다는 투기로 몰리면서 떼돈을 버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의미다.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최대로 치솟았던 98년. 이듬해인 99년에는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 종합지수가 직전 해보다 12.5% 급등했다.
매년 서울 아파트 가격이 두 자릿수 상승을 기록했던 2001~2003년도 마찬가지다.
올 한해 GDP 대비 경상수지 흑자는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로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이미 지난 3분기 말까지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GDP의 5.4%를 기록하고 있다.
각종 규제장치가 작동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년 집값 상승이 우려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전히 불안한 세계 경제 여건은 무역으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의 '원죄'다.
단기적으로는 세계 경기 변동에 대한 대비책이 필요하고, 장기적으로는 내수시장 육성이 필수적이라는 지적이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10월 매일경제가 주최한 세계지식포럼에서 "최근 한국 경제 회복세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며
"국제 교역의 회복에 힘입은 바가 커서 앞으로 세계 경기 회복세에 따라 그 향방이 결정될 것"이라고 날카로운 경고를 날렸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내수 확대에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린다"며
"(내수가 확대될 수 있도록)5년가량은 벌어 놔야 한국 경제의 안정적인 성장을 기약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 용어해설
모멘텀(Momentum) : 경기ㆍ증시 등이 꾸준히 상승할 수 있게 만드는 동력을 의미한다.
"물체가 한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하려는 힘"을 뜻하는 물리학 용어에서 유래했다.